서울 도심을 대각선 방향으로 종단하는 서울 지하철 3호선은 조선왕조의 주요 지점을 대부분 통과합니다. 독립문역에선 독립문, 경복궁역에 내리면 경복궁과 사직단, 안국역에서는 창덕궁과 운현궁, 종로 3가에는 종묘, 동대입구역에선 장충단 터를 가 볼 수 있습니다.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으로 태조 즉위 3년인 1394년에 종묘, 사직단과 함께 건축이 시작되었고, 이듬해에 근정전, 강녕전 등의 중심부가 완성되었습니다. 경복궁과 함께 공사가 시작된 종묘와 사직단은 사극에서 신하들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왕을 향해 간곡하게 외치는 바로 그 곳입니다. 종묘는 조선 왕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고, 사직은 땅의 신 ‘사(社)’와 곡신의 신 ‘직(稷)’을 향해 제례를 올리는 곳인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국가와 동일시했던 것이죠.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종묘와 사직은 모두 불에 타버렸습니다. 선조는 다급히 피난을 가면서도 종묘의 신위는 모셔갔습니다, 종묘는 1608년 재건되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 종묘가 불태워진 정황을 알려주는 흥미로운 기사가 있습니다. 왜장 평수가(平秀家)가 종묘에 주둔할 때, 밤중에 괴이한 일이 생기고, 왜병 중에 갑자기 죽는 자들이 생겼답니다. 평수가가 알아보니 이곳은 조선의 종묘로 신령이 있는 곳이라고 하자 두려워하며 마침내 불을 지르고 남별궁으로 이거하였다는 기록입니다.(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25년 5월 1일자 기사)
환도한 선조는 월산대군의 사저, 지금의 덕수궁에서 잠시 거처하다가 창덕궁으로 이어했습니다. 창덕궁은 1405년 경복궁의 이궁으로 건축되었으나 선조의 이어 이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까지 오랜 세월 조선의 정궁으로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엄숙하고 웅장한 경복궁과는 다르게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궁궐이기도 합니다.
1994년 운현궁 노안당의 보수공사 당시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기록에는 대원군의 호칭이 ‘합하(閤下)’라 쓰여 있었습니다. ‘전하’ 다음의 존칭이므로 흥선대원군의 위세를 짐작하게 해 줍니다. 운현궁은 1852년 고종이 태어난 곳이고, 1866년 왕이 된 고종이 민비와 가례를 올린 곳이기도 합니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중간 정도에 있던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정치생애와 성쇠를 같이 했습니다.
조선은 오랜 세월 중국과 사대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1896년 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허물고 그 앞에 독립문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황제로 등극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인 1895년 고종은 왕비인 민비가 시해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을미사변이지요.
1900년 광무황제는 을미사변 당시 순국한 충신과 열사를 제사지내기 위해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곳에 장충단(奬忠壇)을 건립했습니다. 1695년 세워진 남소영은 왕의 호위군영인 어영청의 분영이기 때문에 연관성은 있는 것이죠. 장충단에는 전각과 부속건물을 건립했고, 매년 4월과 10월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1901년에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당시 순국한 문관과 무관까지 추가하여 신위를 모셨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현충원인 셈이지요.
그러나 1909년 장충단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식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1910년 8월 조선총독부는 장충단을 폐사하고 이 일대를 공원으로 만들었습니다. 30년대에는 일본군 용사의 동상과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박문사(博文寺)를 세웠습니다. 훼손을 넘어 의미가 전복되어 버린 것입니다.
광복 이후 일본군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되었고, 박문사 자리에는 호텔이 들어섰습니다. 지금은 장충단비(奬忠壇碑)만 남아 장충단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뽑혀 버려졌던 장충단비는 1969년 영빈관 옆 비탈에서 발견되었다. 앞면의 ‘장충단(奬忠檀)’이라는 글자는 순종이 황태자시절에 쓴 글씨이다. 뒷면에는 민영환이 쓴 비문이 기록되어 있다.
글쓴이 한애라님은
조각을 전공하고 미술계통의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역사에 빠져버렸다. 적지 않은 나이에 대학원에 입학해 독립운동사를 전공하여 박사과정을 마쳤다.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찾아내 소개하는 걸 좋아하고, 일상이 담긴 생활사, 역사가 켜켜이 쌓인 도시사 등에도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