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대를 흔든 두여인이 잠든곳

일곱 번째 이야기 : 치열하게 살았던 그녀들이 잠든 곳, 태릉과 영휘원 

서울지하철 6호선의 화랑대역과 고려대역에 내리면 한 시대를 쥐락펴락했던 두 여인이 잠들어 있는 곳에 가볼 수 있습니다.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와 고종의 후궁 엄비가 묻혀있는 태릉과 영휘원이 그곳입니다. 

화랑대역 4번 출구로 나와서 태릉 방향으로 걷다 보면 지금은 폐역이 된 옛 화랑대역도 둘러볼 수 있습니다. 1939년 경춘선 개통과 함께 영업을 시작할 때엔 '태릉역'이었지만 1958년에 바로 앞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의 별칭을 따라 화랑대역으로 바꿨습니다. 화랑대역 주변에는 경춘선 숲길과 철도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햇살 좋은 날 산책하기에 딱 좋은 곳입니다.

남편 곁에 묻히고 싶었던 문정왕후

다시 발길을 재촉하여 태릉에 도착하면 입구에 있는 《조선왕릉전시관》부터 둘러보는 게 좋습니다. 이곳에서는 태릉뿐만 아니라 조선과 대한제국 시대 왕실 가족들의 무덤인 능(陵), 원(園), 묘(墓)에 대해 잘 알려주고 있거든요. 

태릉의 봉분에는 12면의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장명등, 망주석, 문석인과 무석인 등이 매우 화려하고 웅장하게 조성되어 있다. 

세조는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병풍석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태릉 봉분에는 유독 화려한 병풍석을 둘렀다. 

태릉에는 중종의 세 번째 왕비인 문정왕후 윤씨(1501∼1565)가 묻혀 있습니다. 17세에 중전이 된 그녀는 공신 집안 출신에 왕자까지 생산한 후궁들 사이에서 비참함과 굴욕을 참아가며 장경왕후의 소생인 세자를 지켜냈습니다. 그러나 34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경원대군을 낳게 되자 이제 세자는 눈엣가시였고, 제거해야 할 정적이 되었죠.
1544년 중종이 죽고, 세자였던 인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9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12살의 경원대군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8년의 수렴청정을 을사사화로 시작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야말로 문정왕후의 시대였죠. 명종이 친정을 시작한 후에도 문정왕후의 권력은 막강했습니다. 

문정왕후는 사후에도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중종 곁에 묻히길 원했습니다. 먼저 1562년 장경왕후의 희릉 서쪽 언덕에 있던 중종의 정릉을 선릉(성종과 정현왕후) 동쪽 언덕으로 천장하였습니다. 선왕이자 양친의 선릉 곁에 남편인 중종과 자신이 함께 자리하는 것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었죠. 문정왕후가 죽기 4년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릉은 지대가 낮아 비가 오면 홍수 피해가 자주 있는 자리였죠. 결국 그녀는 마지막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의 태릉에 잠들게 되었습니다. 
문정왕후 사후 명종은 외숙인 윤원형 일파를 모두 숙청하는 등 정치의 안정을 시도했으나 2년 뒤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명종은 모친인 문정왕후의 태릉 가까이에 묻혔고 능호를 강릉이라고 하였습니다.
태릉은 조선의 어느 왕들보다 규모가 크고, 화려하여 그녀의 권세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유학자 조헌(趙憲, 1544~1592)은 “문정왕후 태릉과 명종 강릉은 그 석물이 사치스럽고 커져서 무거운 석물을 뜰 때 많은 백성이 사상하였다.(『동환봉사(東還封事)』)”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왕비의 권력이 부럽지 않았던 고종의 후궁, 엄귀비

고려대역 인근에는 홍릉수목원이 있고 그 옆에 영휘원과 숭인원이 있습니다. 영휘원은 고종황제의 후궁이자 의민황태자(영친왕) 이은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무덤입니다. 

엄비는 원래 민비를 가까이에서 모셨던 상궁이었죠. 그러다 32살의 나이에 고종의 승은을 입게 되자 민비는 엄상궁을 궁 밖으로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을미사변으로 민비를 잃은 고종은 다시 엄상궁을 불러들였습니다. 10년 만에 궁으로 돌아오며 기사회생한 엄상궁은 이듬해 아관파천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43살에 아들까지 낳게 되었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구가 컸던 엄비도 자신의 아들 이은을 황위에 올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순종이 후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죠. 그녀는 아관파천의 성공으로 고종의 왕비 책봉을 막아냈고, 유력한 왕위 계승자 이강을 견제하여 이은을 황태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여장부 같았던 그녀는 1907년 어린 이은이 인질이 되어 일본으로 떠난 이후 기세가 꺾이고 말았습니다. 끔찍하게 아끼던 아들을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던 엄비는 1911년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엄비의 사인은 두개의 기록이 있습니다. 총독부는 엄비가 장티푸스로 죽었다고 했지만, 『선원보감』 등 조선의 궁중 문서 기록에서는 이은이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주먹밥을 먹고 있는 활동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아 급체로 훙거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어쨌든 1911년 세상을 떠난 엄귀비는 명성황후가 묻혀 있는 홍릉 가까이에 묻혔고 원호를 영휘원이라 했습니다. 자신을 내쫓았던 명성황후 근처이긴 했지만 엄귀비는 영휘원에서 고종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난 후 순종은 자신의 생모인 명성황후의 홍릉을 지금의 위치인 남양주로 천장 한 후 곧이어 고종을 합장하여 능을 조성했습니다. 
홀로 외롭게 남아있던 영휘원 가까이에 손자 이진이 묻히며 숭인원이 조성되었습니다. 이진은 1921년 영친왕 이은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이듬해 영친왕 부부와 함께 일시 귀국하였다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날 덕수궁 석조전에서 급사하고 말았습니다. 순종은 이를 애석하게 여겨 후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엄귀비의 영휘원 남쪽에 묻히도록 했습니다. 영휘원과 숭인원을 둘러보다 보면 어린 손자의 재롱을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글쓴이 한애라님은
조각을 전공하고 미술계통의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역사에 빠져버렸다. 적지 않은 나이에 대학원에 입학해 독립운동사를 전공하여 박사과정을 마쳤다.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찾아내 소개하는 걸 좋아하고, 일상이 담긴 생활사, 역사가 켜켜이 쌓인 도시사 등에도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