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저항의 거리를 걷다.

세 번째 이야기_2호선_예술과 저항의 거리를 걷다. 명동

한 번 떠난 그 사람은 안 오지만
방금 떠난 전철은 다시 와요
인생살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2호선 지하철을 타봐요
약속시간 걱정할 것 없어요 
교통체증 걱정할 것 없어요
승차권 하나 더 준비하면 
애인이 생길지도 몰라요
4호선을 타시려면 사당에서
5호선을 타시려면 왕십리서
2호선은 어디든지 연결되죠
수원이나 인천까지라도...
https://youtu.be/ckQhtfcr5SY

 ‘지하철 2호선’이라는 노래의 한 부분인데 꽤 재밌죠? 예전에는 이 노래가 2호선 당산역 종착 지하철에서 흘러나온 적도 있다고 합니다.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이후 1980년부터 개통이 시작된 서울 지하철 2호선은 1984년 서울대입구-을지로입구 간 구간이 연결되면서 드디어 순환선이 되었습니다.

여의도를 통과하는 단선 노선의 2호선 초기 계획도 

 그런데 처음 2호선의 노선 계획은 순환선이 아니었습니다. 영등포-여의도-마포-을지로-왕십리를 잇는 단선 노선이었죠. 그러나 1976년 당시 서울시장 구자춘은 단 20분 만에 연필 한 자루로 지도 위에 순환선을 그었고, 그 윤곽이 결정되었습니다.  오늘은 서울 중심부를 순환하는 2호선을 타고 문화와 저항의 거리인 명동을 둘러볼까 합니다. 을지로입구역에 하차해서 4번 출구로 나가면 조선시대 그림에 관한 모든 일을 관장하던 도화서(圖畵署)가 있던 자리입니다. 지금은 내외빌딩이 들어서 있죠. 
 5번 출구 앞에는 하나은행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는 이 자리에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1936년 제작된 대경성전도

 동양척식회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일제강점기 착취기관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죠. 그래서 1926년 나석주의사는 조선식산은행에 투탄 후, 곧바로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총격을 가하고 다시 폭탄을 던진 후 일본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순국했습니다.  지금 하나은행 건물 옆에는 나석주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어 그 날의 역사를 기억하게 해 줍니다.

을지로 입구에서 바로 본 을지로 거리, 우측 건물은 동양척식주식회사. 

1908년 일제에 의해 장악원이 헐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들어섰다. 1911년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이 건립되었고 1981년 철거된 후 한국외환은행 본점(現 하나은행)이 세워졌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이 자리에 장악원이 있었습니다. 장악원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 교육하고 관리하는 관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시대부터 명동은 조선에서 손꼽히는 음악가, 무용가, 화가들의 거리였던 것이죠.  근대와 현대를 이어서 이곳은 여전히 예술의 거리입니다. 하나은행에서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의 명동예술극장이 있습니다. 이 건물은 1936년 ‘명치좌’라는 이름으로 건립된 영화전용극장이었습니다. 

1936년 개관한 명치좌

 당시 이 극장은 일본인들이 주로 이용했지만, 모던보이와 모던걸 또한 명치좌에 가는 것이 자랑꺼리였습니다. 1938년 박향림이 부른 ‘오빠는 풍각쟁이야’에서도 명치좌에 구경갈 때는 혼자만 가고, 심부름 시킬 때면 엄벙땡하는 오빠를 핑계쟁이, 트집쟁이라고 부러워하며 투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로 가던 단성사나 우미관, 조선극장 등도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건물이 사라졌고, 명치좌만 남아 있습니다. 명치좌는 해방 이후 국제극장으로 재개관했고, ‘신라의 달밤’이 처음 공연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시공관과 명동예술극장(국립극장)으로 사용되다가 금융업체가 사용했는데, 건물의 노후화로 철거가 논의되자 문화예술계가 나서서 보존운동을 벌여 건물이 사라질 위기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정부에서 매입한 후 이 건물은 리모델링을 거쳐 2006년 ‘명동예술극장’으로 개관했습니다.

 그런데, 이 건물이 1960년 3월에 신문에 크게 등장한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하는 시민들은 많지 않습니다. 4.19가 일어나기 전인 3월 13일 정오에 수많은 고등학생들이 시공관 인근에 모여들었고 몇몇이 시공관 내부로 진입해 2층 베란다에서 혈서를 내어 걸고 구호를 외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건물 바로 옆에는 1950년대와 60년대에 많은 문화예술, 언론인들의 사랑방이 되었던 은성주점이 있었었습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로 시작하는 박인환 시인의 <세월이 가면>도 바로 이 은성주점에서 쓰인 시입니다. 
 지금의 명동은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있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곳곳에 남아 있는 문화와 예술, 그리고 저항의 역사는 지워지지 않고 기억되고 있습니다.

은성주점 터를 알려주는 표지석 




글쓴이 한애라님은
조각을 전공하고 미술계통의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역사에 빠져버렸다. 적지 않은 나이에 대학원에 입학해 독립운동사를 전공하여 박사과정을 마쳤다.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찾아내 소개하는 걸 좋아하고, 일상이 담긴 생활사, 역사가 켜켜이 쌓인 도시사 등에도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