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원에서 어린이대공원까지

여덟 번째 이야기_ 유강원, 군자리골프코스, 그리고 어린이대공원

서울 북동지역의 핫플레이스, 창포원

올리브색 7호선 도봉산역 바로 옆에는 서울 북동쪽 끝자락의 핫플레이스인 서울창포원이 있습니다. 약 1만 6천 평 넓은 부지에 붓꽃원, 약용식물원, 습지원, 넓은잎목원, 늘푸름원 등 12가지 테마공원이 꾸며져 있고, 군데군데 오두막과 벤치, 돌다리 등도 있어 잠시 앉아서 쉬며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거나 계절마다 바뀌는 풍경을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 

유강원이 있던 능동, 골프장에서 어린이대공원으로

다시 7호선을 타고 어린이대공원역에 내려 1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어린이대공원 정문 앞입니다. 지금이야 서울 시내를 포함한 수도권 곳곳에 많은 놀이공원과 테마파크가 있지만 필자의 어린 시절에만 해도 어린이대공원이나 창경원에 가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어린이대공원이 자리한 이곳은 원래 순종의 황후 순명효황후의 묘소인 유강원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순명효황후는 순종이 임금이 되기 전인 1904년에 사망하여 이곳에 모셨다가 순종이 세상을 떠난 1926년에 지금의 유릉에 합장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강원 주위에 세워놓았던 석등과 석주를 비롯한 문석인과 무석인, 석마, 석양, 석호 등의 석물 20여 기는 그대로 남겨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석물 중에 무석인과 문석인의 표정을 보면 다른 곳에 있는 문무석인과는 조금 달라 보입니다. 근엄하고 늠름하면서도 온화한 표정은 느껴지지 않고, 화가 나있는 것 같으면서도 침울하고, 힘이 빠져 있는 것 같은 서글픈 표정으로 보입니다. 국권이 무너져가는 시대의 슬픔이 석공의 손을 통해 스며든 것 같습니다. 

   유강원이 이장한 후 1929년에 유강원 터에는 한국 최초로 18홀 코스를 갖춘 경성골프클럽 군자리코스가 개장하였습니다. 유강원의 석물들은 골프장 이곳저곳으로 옮겨져 조경석이 되었습니다. 처음 개장했을 때는 영친왕을 비롯한 왕가 사람들과 일본인 고위 관료들이 골프를 즐겼습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운영이 중단되었고, 골프장 부지는 농경지로 변했습니다.

  해방 이후인 1949년 이승만대통령은 주한미군장성들이 주말이면 골프를 치기 위해 일본까지 갔다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장 골프코스를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경성골프클럽은 급하게 다시 복구를 마쳤으나 한 달도 안 되어 6.25전쟁이 일어나 다시 폐허가 되었고, 종전 이듬해인 1954년에 서울컨트리클럽으로 재개장하였습니다.
  1963년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대통령이 이듬해 생애 첫 샷을 날린 곳도 바로 이 서울컨트리클럽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샷을 하고는 골프채를 메고 이동했다고 하는데, 이를 군 시절 총을 메고 다니던 기억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대통령을 비롯하여 당시 고위관계자들은 골프를 매우 즐겼고 서울 컨트리클럽을 자주 이용했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 말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컨트리클럽을 이전하고 이곳에 어린이를 위한 대공원을 조성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협의가 늦어져 공사가 시작된 것은 1972년 11월에 이르러서였고, 당시 서울시장은 이른바 ‘180일 작전’을 선포하고 강행군을 지휘하여 6개월만인 1973년 어린이날에 개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어린이대공원 내의 ‘꿈마루’건물은 서울컨트리클럽이 운영되던 시기인 1970년에 준공된 클럽하우스였습니다. 유강원의 석물과 함께 꿈마루 건물은 조선왕실의 릉에서 골프장, 그리고 어린이대공원으로 이어지는 변화와 세월의 흔적들입니다.

꿈마루는 서울컨트리클럽의 클럽하우스로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 나상진(1923~1973)이 1968년 설계하고 1970년 준공한 건축물이다. 
어린이대공원 개원 시 교양관으로 활용되다가 전면 철거의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근대건축 문화적 자산’의 가치를 인정받아 리모델링을 통해 현재의 꿈마루가 됐다.


어린 여성노동자, 순이가 살던 집

  7호선의 서남쪽 가산디지털단지역에 내려 도로변에 줄지어 서있는 빌딩과 깨끗하게 정리된 거리를 보면 이 곳의 옛 풍경이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가산디지털단지역의 옛 역명은 가리봉역이었는데,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가리봉동에는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모여 살던 쪽방촌이 즐비했습니다.

 7호선의 서남쪽 가산디지털단지역에 내려 도로변에 줄지어 서있는 빌딩과 깨끗하게 정리된 거리를 보면 이 곳의 옛 풍경이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가산디지털단지역의 옛 역명은 가리봉역이었는데,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가리봉동에는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모여 살던 쪽방촌이 즐비했습니다.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금천 순이의 집’과 전시관인 ‘가리봉 상회’ 
  큰 거리의 모습이 많이 변해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지만, 역 인근 주택가에 당시 여공들이 살았던 쪽방촌의 모습을 복원한 체험관이 2013년에 설립되어 당시 노동자들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와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급성장한 한국 경제의 진짜 일꾼들이었고, 한국의 민주화에도 큰 공헌을 한 그들의 고단했던 삶과 노고가 조금은 느껴지는 곳입니다.



글쓴이 한애라님은
조각을 전공하고 미술계통의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역사에 빠져버렸다. 적지 않은 나이에 대학원에 입학해 독립운동사를 전공하여 박사과정을 마쳤다.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찾아내 소개하는 걸 좋아하고, 일상이 담긴 생활사, 역사가 켜켜이 쌓인 도시사 등에도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