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난리에 드러난 고대 유적

아홉 번째 이야기_ 을축년 물난리에 드러난 고대 유적 (8호선)

1996년 개통한 서울 지하철 8호선은 서울 강동지역의 대단위 주택밀집지역과 경기도 성남시를 연결하는 노선으로 암사역을 출발해 잠실과 송파를 지나 성남으로 향합니다. 오늘은 8호선을 이용하여 아주 오래된 유적인 암사동 선사유적지, 풍납토성, 그리고 몽촌토성을 둘러보겠습니다.

을축년 대홍수로 드러난 선사와 백제의 유적

1925년 7월 중순, 그야말로 역사에 남을만한 비가 쏟아졌습니다. 이 호우로 인한 피해액은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나 되었으니 피해가 어느 정도였을지 상상이 안 될 정도입니다. 크고 작은 강들은 모두 범람했는데, 그 중 한강변의 피해가 가장 심각했습니다. 한강이 범람하자 이촌동·뚝섬·송파 일대가 사라지다시피 했고, 용산 일대도 물에 잠겨버렸습니다. 전국적으로 익사자만 640여 명에 이르렀는데 400여 명이 서울지역의 사망자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늘과 바다가 뒤집어진 것 같다며 탄식했습니다.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을축년 대홍수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걸 다 휩쓸고 지나간 물난리로 우리나라 선사와 고대 역사의 실마리가 풀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땅 속에 묻혀있던 암사동 선사유적지와 풍납토성의 유물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6천 년 전의 신석기 사람들이 모여 살던 마을, 암사동.

홍수가 암사동 유물을 '발굴'했지만, 일본학자들은 엄청난 양의 토기편들과 석기를 수습해 가기만 하고, 본격적인 발굴이나 조사를 하진 않았습니다. 당시 일본학자들은 고분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니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서울 암사동 5호 집터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로 음식의 저장과 운반, 조리 등의 생활용기로 만들었다. 당시 사람들의 미적 감각과 생활양식도 엿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암사동 유적에 대한 제대로 된 발굴조사는 1970년대부터였습니다. 수차례의 조사 결과 3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고, 가장 주목을 받은 건 당연히 최하층의 신석기 시대층이었죠.
약 6천 년 전 유적으로 밝혀진 암사동 선사유적에서는 우리나라 신석기 유적 중에 최대인 50여 기의 집터가 확인되었고,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한 여러 종의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는 간결한 V자의 정형미와 규칙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완성도 높은 토기였습니다. 
이밖에 출토된 유물 중에 보습과 돌낫 등의 농기구는 이곳에서 일부 밭농사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고, 불에 탄 도토리, 갈판과 갈돌은 당시 사람들의 주요한 식량이 도토리였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암사동 유적지에 가면 박물관과 복원해 놓은 움집 9기를 둘러 볼 수 있고, 체험 마을과 체험 움집 1기도 있어 신석기인의 생활을 상상하며 신석기시대를 경험해 볼 수도 있습니다.

초기 백제의 위상을 드러낸 도성, 풍납토성

암사동 유적과 마찬가지로 풍납토성도 을축년에 그 존재를 드러냈습니다. 흙이 다 쓸려 내려가면서 남벽 부근에서 묻혀있던 커다란 항아리 속에서 청동제 초두, 청동 거울 등 중요 유물이 출토되면서 백제의 유적으로 주목을 받았고, 일제강점기 당시인 1936년에 이미 고적 제2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해방 이후인 1964년 처음으로 학술조사가 있었으나 초기 한성백제의 왕성(王城)인 하남위례성인지, 아니면 방어용 성인지 그 성격이 확인되지 않아 이후 오랫동안 논란을 겪었습니다. 오히려 그 주변에 있던 몽촌토성이 위례성일거라는 견해가 더 힘을 얻기도 했었죠.
그도 그럴 것이『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조선시대의 문헌에서도 위례성의 위치를 분명하게 밝힌 기록이 없어 이렇게 오랫동안 논란이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이곳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던 이형구교수가 1997년 1월에 풍납동 토성 내부의 재개발공사 현장에 몰래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다량의 백제 유물들을 발견,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신고하면서 비로소 대대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되었고, 조사 결과 백제 왕궁 유적을 비롯한 판석 도로 등 하남 위례성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게 되었죠.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여 열 명의 신하들로 보좌토록 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니, 때는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이었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옥산서원본(1537년 보물 제525호) )

지금까지 밝혀진 풍납토성의 규모는 성벽의 전체 둘레가 약 3.5km에 성벽의 폭이 43m, 성벽의 최상부 높이는 9.5m에 달합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토성 가운데 큰 규모에 속하고, 백제의 위상과 국력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꿈길을 걷는 듯 몽촌토성

몽촌토성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중반에 학계에 처음 알려졌지만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가 확정되자 송파 일대 백제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몽촌토성의 발굴조사는 1983년부터 다급하게 진행되었지만 그나마 대규모 주택단지가 이미 들어선 다른 지역보다는 사정이 나았죠.
조사 결과 몽촌토성은 타원형의 야산 위에 진흙으로 판을 다져 쌓아 만든 토성으로 남북 730m, 동서 570m의 마름모꼴 형태로 성의 둘레는 약 2.4km에 달하고 성벽 밖에는 높이 2m의 목책과 해자를 설치한 비교적 큰 규모의 성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토성의 규모와 구조 등으로 몽촌토성은 한동안 백제 초기의 왕성으로 알려졌으나 풍납토성의 발굴로 두 토성의 관계가 재정립되었습니다. 풍납토성은 평소 왕이 거주하는 정궁이자‘북성(北城)’이고, 몽촌토성은 비상시를 염두에 둔 방어성이자 별궁인 ‘남성(南城)’일 가능성이 높아졌죠.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발굴조사는 최근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최근에는 목책을 세웠던 흔적으로 알려졌던 구덩이가 토성벽을 축조하기 위해 세운 판목을 고정시키는 일종의 기둥목과 보조기둥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475년 이곳을 점령했던 고구려군이 사용한 토기류와 중국과의 교류를 엿 볼 수 있는 다량의 유물이 계속 출토되고 있어 이곳이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기 한성백제의 실체와 주변국과의 관계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울시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비롯한 한성백제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백제역사유적지구'로 확장 등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글쓴이 한애라님은
조각을 전공하고 미술계통의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역사에 빠져버렸다. 적지 않은 나이에 대학원에 입학해 독립운동사를 전공하여 박사과정을 마쳤다.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찾아내 소개하는 걸 좋아하고, 일상이 담긴 생활사, 역사가 켜켜이 쌓인 도시사 등에도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