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9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한강철교가 가설되지 않아 인천의 제물포역과 한강 건너 노량진역까지만 운행되었습니다. 그 후 1900년 7월 한강철교가 개통되면서 서울 도심인 경성역까지 기차가 도착하여 경인선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경성역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서울역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경성역은 지금의 5호선 서대문역 인근에 있는 이화여고 내에 있었고 서대문정거장이라고도 했습니다.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서울 도심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종로축의 시종착점이었고, 이후 경의선의 분기점이 될 계획이었죠. 그러나 경의선의 분기점이 용산역이 되고, 지금의 서울역인 남대문정거장이 영업을 개시하면서 그 위상이 급격하게 추락하였습니다. 결국 1919년 폐역이 되어 우리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충정로역에 내리면 우리나라에서 서양식으로 건축된 최초의 성당인 약현성당에 갈 수 있습니다. 염천교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에 위치한 중림동 약현성당은 로마네스크와 고딕양식을 절충하여 1892년 9월에 준공한 건평 120평의 아담한 성당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성당은 이후 1898년에 완공된 명동성당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약현(藥峴)’은 말 그대로‘약초밭이 있는 고개’라는 뜻인데, 이 언덕에 성당을 세운 것은 천주교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성당이 있는 언덕에 오르면 염천교 옆에 얼마 전 개관한 서소문역사공원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자리는 조선시대 풍수설에 따라 숙살지기(肅殺之氣)가 있다고 하여 처형장으로 사용한 장소로 임오군란, 동학, 갑신정변 등 사회변혁을 꿈꾸던 인물들과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되었고, 홍경래와 김개남 등의 수급이 효시된 곳이었습니다.
100년이 넘는 세월을 견디며 서있던 약현성당은 몇 차례의 개조와 복원공사가 있었습니다. 준공 13년 후인 1905년에는 종탑이 세워졌고, 1921년에는 남녀를 구분하는 내부칸막이를 철거하고, 벽돌기둥을 돌기둥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1974년에는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76년에 완성하였습니다. 이 복원공사 당시 이전에는 없었던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98년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행려자의 방화로 본당 내부가 모두 불에 타고 첨탑도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당시 현장에서 붙잡힌 방화범은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성모마리아는 웃고 있었다’라며 횡설수설하기도 하여 더욱 기가 막혔었죠.
성당 내부가 모두 화마를 입어 큰 피해를 보았지만 아이러니한 일도 있었습니다. 한국 성당 최초로 한국작가에 의해 제대 뒤편에 설치되었던 스테인드 글라스는 뜨거운 불길로 인해 유리 내부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면서 오히려 더욱 아름답고 신비한 빛을 발산하여 ‘보석의 빛’이라는 찬사를 받게 되었으니까요.
서쪽에 있는 서대문역과 충정로역을 둘러보았으니 이번에는 5호선의 동쪽으로 발길을 돌려볼까요? 한강을 건너기 전 아차산역에 내리면 우리나라 상수도시설의 발전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구의정수장에 갈 수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하는 수도가 없다면 과연 우리의 생활은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상수도 생산시설이 건설된 곳은 1908년 완공된 뚝도정수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차산역 근처에 있는 구의정수장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우리나라 수도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36년 착공항 1941년 완공한 제1정수장은 현존 최고(最古)의 급속여과지 원형이 보존된 곳이고, 1959년 미국원조와 기술지원으로 건설된 제2정수장은 당시 신기술인 고속응집침전지를 적한 유일한 시설입니다.
l974년 ·l984년에 지은 제3, 제4정수장은 현재 서울 동부 7개구 시민들의 식수를 공급하고 있어 상수도 발전의 역사와 생산과정을 견학할 수 있는 곳이라 가 볼만한 문화재입니다.
글쓴이 한애라님은
조각을 전공하고 미술계통의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역사에 빠져버렸다. 적지 않은 나이에 대학원에 입학해 독립운동사를 전공하여 박사과정을 마쳤다.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찾아내 소개하는 걸 좋아하고, 일상이 담긴 생활사, 역사가 켜켜이 쌓인 도시사 등에도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