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호선 당고개에서 지하철을 타면 곧 창동역에 다다르죠. 일제강점 막바지 창동에는 부일 협력을 거부하고 감시와 탄압을 받던 인사들이 하나 둘 이사 와 은둔하기 시작했습니다.
1934년 독립운동 관련 무료변론으로 유명했던 변호사 김병로가 이사를 와 자리를 잡았고, 1938년엔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폐간되면서 사장직을 사직했던 송진우가, 1940년에는 민족말살정책을 막아내고자 했던 역사학자이자 언론인 정인보가 창동으로 터전을 옮겼습니다.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1888-1964) : “모든 사법 종사자에게 굶어 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그랬다. 그것은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는 명예롭기 때문이다.”
- 대법원장 퇴임식 이임사에서(1957.12.16.)
1926년 고하 송진우 수형기록부 : 고하 송진우(1890~1945)는 1926년 동아일보의 3·1운동 7주년 기념사 보도와 관련하여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복역하였다.
위당 정인보(1893-1950)는 강제병합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신채호, 박은식 등과 동제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나 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귀국한 후 독립운동을 펴다 수차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 정인보는 삼일절, 제헌절, 광복적, 개천절의 날을 작사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창동의 세 마리 사자’라고 했답니다. 당시 김병로는 농사를 지으며 닭을 1,500마리나 키우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사료를 구하기 위해 일본 관리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닭을 모두 처분해 버린 일도 있었습니다. 1939년에는 홍명희도 이사를 왔는데, 이들을 만나러 창동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 대부분은 요시찰 인물인 독립운동가들이 많았기 때문에 당시 관할 양주 경찰서에는 고등계가 설치되었고, 창동 주재소에는 고등계 형사가 상주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1904년 미국으로 망명했던 이승만은 1945년 10월에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1948년 8월 초대대통령에 선출되어 경무대로 옮겨 가기 전까지 조선호텔-돈암장-마포장-이화장에 거처했습니다. 4호선 한성대입구역과 혜화역에 내리면 돈암장과 이화장에 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현대정치사에서 매우 비중 있는 곳인데, 어찌 된 일인지 이화장과 달리 돈암장이나 마포장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죠.
귀국한 이승만박사는 처음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고 보름 정도 지냈는데, 방문자가 너무 많아 문제가 되자 당시 (주)조선타이어 사장 장진영이 집을 내주었습니다. 이 집이 이승만의 첫 사저 돈암장입니다. 그 후 돈암장은 해방정국의 우익인사들의 집결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진영은 2년 후에 자기 짐을 들여놓으며 이승만을 돈암장에서 쫓아냈습니다. 자신의 사업에 도움이 될 줄 알았던 이승만이 미소공위 문제로 미군정과 갈등을 겪다가 급기야 고립무원의 상태에까지 이르자 더 이상 별 볼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1948년 이승만박사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장진영의 심정은 어땠을까?
2년 정도 살았던 돈암장에서 나오게 된 이승만은 하지중장의 주선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다나카(田中)가 쓰던 마포장(麻浦莊)으로 이사하여 2달 간 머물다 1947년 11월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어 경무대로 거처를 옮겼지만 장기집권과 부정선거로 인해 4.19 혁명이 일어나 하야하고 경무대를 떠났습니다. 이승만은 다시 이화장으로 돌아왔지만 그곳에서도 여생을 마치지 못하고 5월 29일 하와이로 영원한 망명길을 떠났습니다.
충무로역 3번과 4번 출구 샛길로 200m 정도만 올라가면 남산한옥마을에 도착합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3.1운동 진압으로 악명이 높았던 무단통치의 상징인 조선헌병대와 사령부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군 시설로 사용되다가 1962년 수도경비사령부(1984년 수도방위사령부로 개칭)가 자리를 잡았는데, 1990년부터 시작된 남산제모습찾기 사업으로 1년 후 수도방위사령부가 이전하고 1998년 한옥마을이 개관했습니다.
연못이 있는 전통 정원과 계곡, 그리고 1890년대부터 1910년대에 지어진 멋스러운 한옥을 구경하며 산책할 수 있는 한옥마을에는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 삼청동 오우장 김춘영 가옥, 민영휘의 저택 가운데 안채 일부와 문간채를 옮겨 놓은 관훈동 민씨 가옥, 그리고 윤덕영의 소유였던 옥인동 윤씨 가옥,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이 이전, 복원되어 있습니다.
민씨 가옥의 주인이었던 민영환이나, 윤덕영·윤택영 형제는 모두 축재와 매국으로 작위까지 받은 일제강점기 최고의 친일 고관대작들이죠. 그러나 친일의 길을 선택한 윤택영의 장남 윤홍섭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일본 유학시 신익희, 나경석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모의했고, 1919년에는 3.1운동 전에 운용구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하다가 체포당해서 취조를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참의원을 주겠다는 일제의 회유도 거절하며 굳은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장녀인 순정효황후가 된 장녀 윤증순은 강제병합 직전 치마 속에 옥쇄를 숨겼지만 백부인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겨, 대한제국의 국권을 뺏기는 상황을 목격했던 조선의 마지막 황후입니다.
1960년대 초 작고 수년전의 순정효황후 윤씨. 격변의 시기를 겪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온화함과 황후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아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만 살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모든 일엔 명암이 있기 마련이죠. 그 안에 살던 사람이 모두 아름답지만은 않았더라도 이 한옥들의 가치마저 저평가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이곳의 한옥들은 모두 소중한 우리의 건축물이니까요.
글쓴이 한애라님은
조각을 전공하고 미술계통의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역사에 빠져버렸다. 적지 않은 나이에 대학원에 입학해 독립운동사를 전공하여 박사과정을 마쳤다.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찾아내 소개하는 걸 좋아하고, 일상이 담긴 생활사, 역사가 켜켜이 쌓인 도시사 등에도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