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9호선 이야기는 개혁군주 정조의 의지를 느낄 수 있는 용양봉저정으로 가보겠습니다. 9호선 노들역 3번 출구로 나와 200m 정도 걸어가다 보면 오래된 석축 기단위에 자리 잡은 용양봉저정이 있습니다. 용이 뛰놀고 봉황이 높이 나는 정자라는 의미의 용양봉저정은 바로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홍씨와 화성 행차시 잠시 머물며 점심을 했던 곳입니다.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역사이지만, 정조는 1789년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산(花山)으로 이장한 후 해마다 1월 혹은 2월에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화성을 방문했죠. 그러다가 1795년 즉위 20주년이자 혜경궁 홍씨와 죽은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아 역사상 가장 화려한 잔치를 화성에서 열기로 합니다.
『화성능행도』8폭 中 ‘노량주교도섭도’에는 행차 마지막 날인 1795년 윤2월 6일 용양봉저정에서 출발하여 배다리를 건너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 행차에서 가장 큰 문제는 한강을 건너는 일이었습니다. 예전 연산군은 사냥을 가기 위해 배다리를 만들면서 백성들의 배를 800척이나 동원하여 원성이 높았었죠. 정조는 이런 일을 막기 위해 1789년에 주교사라는 배다리 관리관청을 설치하였지만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정약용으로 하여금 새로운 배다리의 설계를 지시했습니다.
튼튼하고 웅장하게 만들어진 배다리는 한강을 가로질러 노량행궁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동원된 배는 단 36척이었습니다. 정조는 배주인들에게 세곡운반 등의 혜택을 주었습니다.
정조는 용양봉저정에 먼저 들어가 어머니가 머물 방의 온돌을 살핀 후 혜경궁을 모셨답니다. 그리고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마치고 잠시 쉬었다가 시흥행궁을 향해 출발합니다. 돌아오는 길인 2월 16일 다시 용왕봉저정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배다리를 건너 환궁하였습니다. 행차가 지나는 곳곳마다 왕의 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백성들은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는데, 정조는 이들의 구경을 막지 말라고 명령하였고, 격쟁을 허용하여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경청하기도 했습니다.
용양봉저정은 원래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이양원이 살던 망해정으로 그의 후손 이승묵이 살고 있었는데, 정조는 이 터를 사들여 개수하고, 용양봉저정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1907년 8월 용양봉저정은 유길준에게 하사되었고, 그는 1914년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얼마 후 용양봉저정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는데, 일본인 주인은 이 일대의 땅을 더 사들여 온천, 무도장, 운동장 등을 갖춘 대규모 위락시설을 만들었고, 용양봉저정은 요릿집 ‘용봉정’이 되었습니다.
2016년부터 220여 년 전 정조의 화성행차의 전 구간을 재현하는 행사가 해마다 열리고 있습니다. 서울·수원·화성·안양시 등 해당 지자체가 참여하는 연합행사로 작년에는 5,069명의 인원과 말 690필이 참여하였습니다. 가장 인기를 끈 구간은 바로 배다리였습니다. 그러나 용양봉저정은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죠.
나지막한 언덕위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용양봉저정에 올라 한강을 내려다보며 정조의 마음을 상상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듯합니다.
노들역 옆에는 여의도가 있습니다. 고층 빌딩이 즐비하고, 금융가가 모여 있어 ‘한국의 맨해튼’이라고도 불리는 여의도는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가축을 방목하여 키우는 목축지 정도의 섬이었습니다.
여의도의 쓰임이 달라지고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입니다. 1916년 간이비행장을 건설하였고, 1922년 12월 10일 안창남 비행사가 고국 방문 비행을 선보이면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조선의 공중용사 안창남의 비행을 보기 위해 5만 명의 인파가 경향각지에서 몰려들어 당시 철도국에서는 임시열차까지 운행하였으니 열기를 짐작할 만하죠.
해방 이후인 1945년 8월 18일 한국광복군 국내정진대 이범석, 김준엽, 노능서, 장준하 대원은 미국 OSS대원과 함께 C-47 수송기를 타고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했지만, 일본군의 제지로 되돌아 간 일도 있습니다.
1949년 10월 1일, 공군이 창군된 후 여의도비행장은 공군과 민간비행장으로 함께 사용되다가 1985년 김포비행장이 건설되자 민간항공이 이전했고, 1971년 공군기지가 성남비행장에 건설되면서 여의도에는 비행기의 이착륙이 사라졌습니다.
1968년 국회 의사당 건립 후보지로 여의도가 정해진 후 개발되어 광장이 되었는데, 당시에는 5.16광장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원래 여의도광장은 계획에 없었는데,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유사시에 활주로로 사용하기 위해 그대로 두라고 한 것이랍니다.
어쨌든 1980년대에 여의도 광장은 벚꽃이 피는 봄, 그리고 주말만 되면 롤러스케이트와 자전거를 타러 오는 시민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였습니다. 1997년 숲과 연못이 있는 공원으로 탈바꿈했고, 4월 벚꽃축제와 2010년 10월부터 매해 열리는 세계불꽃축제는 많은 관람객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행사가 되었습니다.